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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 나오면서 "좋은 건 알겠는데, 뭔 얘기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동행에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2018년작 <버닝>이 바로 그 영화였습니다. 두 번 보고 나서야 이 작품이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느끼게 만드는가에 관한 정교한 설계도라는 걸 알았습니다.

 

종수·해미·벤, 세 사람이 존재하는 방식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이걸 실종 스릴러로 받아들였습니다. 해미가 사라지고, 종수가 쫓고, 벤이 의심받는 구조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영화를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분류하는 경향이 있는데, 제 경험상 그 틀로 접근하면 2시간 28분 내내 허탈함만 남습니다. 이 영화는 장르적 쾌감을 주지 않으니까요.

세 인물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presence)을 획득합니다. 여기서 존재감이란 단순히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인식 안에서 실재로 자리 잡는 상태를 말합니다. 해미는 종수에게 판토마임(pantomime) 기법으로 이를 설명합니다.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된다고요. 판토마임이란 말과 소도구 없이 몸짓만으로 대상을 실재처럼 느끼게 만드는 퍼포먼스 기법입니다. 귤이 없어도 먹는 행위에 집중하면 신맛이 느껴지는 것처럼, 해미는 존재의 실재성은 물리적 확인이 아닌 믿음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벤은 반대 방향에서 존재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버려진 것들을 발견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죠. 종수에게 "소설 뭐 쓰고 싶어요?"라고 가장 먼저 물어본 것도 벤이었습니다. 그리고 종수는 해미가 사라진 뒤에야, 그 공백 속에서 비로소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 구조가 제게는 가장 서늘하게 느껴졌습니다.

  • 해미: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 강하게 인식되는 존재
  • 벤: 타인의 결핍을 발견하고 그것을 촉발하는 존재
  • 종수: 보고 듣고 쓰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인물
요약: 세 인물은 각각 '사라짐', '발견', '서술'이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구성하며, 이것이 영화 전체의 구조를 이룬다.

 

1인칭 시점의 미장센,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제가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봤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시점의 문제였습니다. 영화 내내 카메라는 종수의 눈에 철저히 밀착되어 있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구도·배우의 위치·색감 등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뜻합니다. <버닝>의 미장센은 일관되게 종수의 시선을 특권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미와 벤을 이해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종수의 편견과 결핍 위에 세워져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영화 3막, 즉 종수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부터 카메라는 슬그머니 벤의 내부로 들어갑니다. 렌즈를 교체하는 벤의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이건 1인칭 서술자(종수)만이 접근 가능한 세계가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확장되는 순간입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만이 등장인물의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그 순간부터 우리가 보는 장면은 실제 사건인지, 종수가 쓴 소설인지, 혹은 우리가 원하는 결말을 투영한 것인지 구분이 불가능해집니다.

일반적으로 이 3막을 '종수의 복수'로 단순하게 읽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봤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소설 속 진실과 현실 속 진실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3막의 살인 장면이 소설이라면, 그 소설을 쓴 종수는 처음으로 자기 방식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셈입니다. 과거의 무기력함을 태워버리고요.

요약: 영화의 시점 구조 자체가 서사이며, 3막의 전환은 종수가 수동적 관찰자에서 능동적 서술자로 이행하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탁월한 연출, 그러나 솔직히 인정할 한계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2018년 칸 영화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고 출처: The Guardian이 "올해 칸의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극찬했을 때, 저도 그 평가에 완전히 동의하고 싶었습니다. 유아인이 세상의 벽 앞에서 분노를 억누르는 얼굴, 스티븐 연이 친절 뒤에 공허함을 감추는 방식, 그리고 전종서가 석양 아래에서 아프리카 부시맨의 춤을 추는 그 장면은 저도 이 영화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 즉 배고픔이 아닌 삶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굶주림을 몸으로 표현하는 그 장면은 설명 없이도 모든 걸 말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시나리오 분석을 제대로 하고 나서 오히려 해미 캐릭터에 대한 불편함이 더 커졌습니다. 영화가 해미의 존재 방식을 이론적으로는 가장 설득력 있게 구성했지만, 실제 스크린 위에서 해미는 종수의 성적 시선과 벤의 심심풀이 사이에 놓인 채 한 번도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독립적으로 발화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의도된 연출이라 해도, 그 효과가 여성 캐릭터를 소모하는 방식과 겹쳐 보인다는 점은 제가 직접 두 번 보고 내린 판단입니다.

148분의 러닝타임과 의도적으로 늘어지는 롱테이크(long take) 기법, 즉 편집 없이 하나의 장면을 길게 찍어 시간의 밀도를 높이는 촬영 방식은 분명히 영화의 불안감을 증폭시킵니다. 하지만 제 경우엔 후반부로 갈수록 이 긴장이 폭발하기보다 서서히 새어나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은유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감각이 무뎌집니다.

요약: 미장센과 배우의 앙상블은 탁월하지만, 해미 캐릭터의 수동성과 은유 과잉은 영화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희석시키는 실질적 한계다.

 

자주 묻는 질문

Q. 버닝에서 벤이 진짜 범인인가요?

A. 영화는 이를 끝까지 확정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벤을 살인자로 단정하는 시각이 많은데, 저는 그것이 종수의 1인칭 편견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라고 봅니다. 화장실에서 발견한 시계, 낯선 고양이 등은 모두 정황일 뿐 증거가 아닙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Q. 해미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가요, 아니면 종수의 상상인가요?

A. 영화 속에서 해미는 실존 인물로 묘사됩니다. 다만 종수가 그녀를 실제로 잘 알고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 경험상 이 질문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해미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가 그녀를 더 잘 알게 된다는 역설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Q. 영화 버닝 원작 소설이 따로 있나요?

A. 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곳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며, 이창동 감독이 한국의 청년 세대 서사를 더해 각색했습니다. 원작 단편은 분량이 매우 짧기 때문에 영화의 대부분은 감독의 독자적인 창작입니다.

 

Q. 버닝 보기 전에 원작 단편을 읽는 게 도움이 될까요?

A. 저는 영화를 먼저 보고 단편을 읽었는데, 오히려 그 순서가 낫다고 느꼈습니다. 원작을 먼저 알면 영화가 어디서 원작을 이탈하는지에 집중하게 되어 영화 자체의 흐름에 몰입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영화를 두 번 보고 원작을 읽는 것을 권합니다.

 

결론

<버닝>은 제가 두 번 보고 나서야 비로소 좋아진 영화입니다. 처음에는 불친절하고 느리다고 느꼈고, 그 판단은 지금도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것은 스릴러적 쾌감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의 몸 안에 심어두는 감각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주변 사람들이 달리 보였다면, 그게 바로 이창동 감독이 원한 효과였을 겁니다.

해미처럼 존재하지만 소외된 사람들, 종수처럼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다 실제를 놓치는 순간들, 벤처럼 타인의 결핍 위에서만 존재감을 확인하는 방식들. 이 모든 게 2018년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불편하고 느리더라도 한 번은 끝까지 볼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WrAB7WfNg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