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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2022년 칸영화제 황금 종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만 보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들어갔는데, 막상 보고 나니 제가 생각했던 '상류층 풍자 영화'의 범주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위계와 가식이 산산조각 나는 과정을 이렇게 지독하고 유쾌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계급 역전 — 청소부가 권력자가 되는 순간, 무엇이 달라졌을까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강렬하게 느낀 장면은 3부 무인도 시퀀스였습니다. 호화 크루즈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던 청소부 애비게일이, 섬에 고립된 순간부터 절대적인 권력자로 탈바꿈하는 그 전환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영화는 계급 역전(class inversion)이라는 개념을 실험적으로 구현합니다. 여기서 계급 역전이란, 기존 사회 구조에서 최하층에 속하던 존재가 특정 조건 아래 최상위 권력을 갖게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문명의 편의가 사라진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능력, 즉 불을 피우고 문어를 잡고 식량을 분배하는 기술을 오직 애비게일만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입니다. 애비게일은 권력을 쥔 뒤 곧바로 기존 상류층이 하던 방식 그대로 타인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음식을 대가로 상류층 남성 칼을 가까이 두고, 자신에게 협조하는 자에게만 보상을 줍니다. 구조가 뒤집혔는데 작동 방식은 똑같다는 점이,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부분이었습니다.

영화가 짚어내는 '생존 능력'과 권력의 관계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권력의 원천이 자본이 아닌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을 독점하는 능력'에 있다는 점을 무인도라는 극단적 상황을 통해 보여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그 역할을 했다면, 무인도에서는 사냥 기술이 그 자리를 대체한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이 설정이 단순한 뒤집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훨씬 깊은 질문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권력의 토대는 얼마나 우연적이고 맥락 의존적인 것일까요? 애비게일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어서 독재자가 된 게 아닙니다. 그저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필요한 자'였을 뿐이라는 점이, 오히려 더 냉혹한 진실처럼 느껴졌습니다.

  • 크루즈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급 직원, 눈에 띄어선 안 되는 존재
  • 무인도에서: 식량과 불을 독점한 유일한 생존 전문가
  • 엘리베이터 발견 후: 새로운 세계 질서 앞에서 무너지는 권력자
요약: 무인도라는 극단적 환경은 자본이 아닌 생존 능력이 권력의 원천임을 보여주며, 계급이 뒤집혀도 지배 구조의 작동 방식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씁쓸한 사실을 드러냅니다.

 

자본주의 풍자와 열린 결말 — 이 영화, 어디까지 깊은 걸까

영화를 보고 나서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지점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2부 호화 요트의 폭풍우 장면, 선장과 러시아 비료 재벌이 술에 취해 마르크스와 레이건을 교차 인용하며 설전을 벌이는 동안 갑판 위에선 승객들이 구토와 배설물로 뒤엉키는 그 장면은, 제가 본 어떤 사회 풍자 영화보다 직접적이고 폭력적이었습니다.

풍자 영화(satire film)는 사회의 모순을 과장이나 희화화를 통해 비판하는 장르입니다. 쉽게 말해, 웃기지만 웃고 나면 뒷맛이 쓴 영화입니다. 《슬픔의 삼각형》은 이 공식을 매우 충실하게 따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쌓은 품격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지를 시각적으로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출처: 아르떼 영화 분석).

그런데 제가 직접 보고 난 뒤 든 솔직한 생각은 이겁니다. 이 영화의 풍자는 강렬하지만, 어딘가 일차원적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상류층이 오물을 뒤집어쓰는 장면이 주는 즉각적인 쾌감, 청소부가 부자 남성을 착취하는 역할 역전이 주는 말초적 카타르시스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조적 모순에 대한 깊이 있는 해부로 이어지는지에 대해선, 저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열린 결말이 남긴 질문 — 회피일까, 선택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랫동안 저를 붙들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발견한 야야를 향해 돌을 들고 달려가는 애비게일,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채고 필사적으로 질주하는 칼. 화면은 거기서 끊깁니다.

열린 결말(open ending)이란 서사의 해소 없이 관객에게 해석을 맡기는 결말 방식입니다. 여기서 열린 결말이란 단순히 마무리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의도적으로 관객을 판단의 주체로 세우는 전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마지막 장면이 세련된 선택인지, 아니면 감독 스스로가 풀지 못한 딜레마를 관객에게 떠넘긴 것인지 솔직히 구분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보여준 계급 서사와 비교하면, 《슬픔의 삼각형》의 풍자는 보다 직관적이고 자극적인 방향을 택했습니다. 《기생충》이 계급의 비극을 인물의 내면에서부터 촘촘하게 쌓아 올렸다면, 이 영화는 상황의 극단성을 통해 같은 진실을 보여주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기보다는, 루벤 외스틀룬드가 택한 길이 분명히 더 많은 관객과 즉각적으로 충돌하는 방식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출처: 씨네21 비평).

염세주의(pessimism)적 세계관, 즉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 불신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시선은, 어떤 대안도 희망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점이 때로는 무력감으로 느껴졌습니다. 계급은 어차피 바뀌지 않고, 권력을 잡은 자는 결국 같은 방식으로 타인을 억압한다면,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그 질문에 이 영화는 아무 답도 주지 않습니다.

요약: 강렬한 자본주의 풍자와 계급 역전의 쾌감은 분명하지만, 열린 결말과 철저한 염세주의적 시선은 관객에게 사회적 성찰보다 무력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논쟁의 여지를 남깁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슬픔의 삼각형 결말에서 애비게일은 야야를 실제로 죽이는 건가요?

A.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열린 결말 방식으로 서사를 끊기 때문에, 관객이 직접 해석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다만 애비게일이 돌을 든 채 달려가는 장면은 그녀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분명히 암시합니다. 이 장면 덕분에 저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 그 뒷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Q. 슬픔의 삼각형이 기생충이랑 어떻게 다른 영화인가요?

A. 두 영화 모두 계급 불평등을 다루지만 접근 방식이 상당히 다릅니다. 《기생충》이 인물의 감정과 내면을 통해 계급의 비극을 서서히 쌓아 올린다면, 《슬픔의 삼각형》은 극단적 상황과 블랙 코미디라는 형식으로 계급 모순을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충돌시킵니다. 제가 직접 두 편을 비교해보니, 여운의 종류 자체가 다르게 남는 영화들이었습니다.

 

Q. 2부 요트 장면이 너무 역겨운데 이 부분이 꼭 필요한가요?

A.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장면입니다. 돈으로 쌓아 올린 품격과 지위가 자연의 물리적 조건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극단적인 시각적 충격을 선택했습니다. 역겨움 자체가 메시지의 일부이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이 장면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Q. 제목 '슬픔의 삼각형'이 무슨 의미인가요?

A. 원제 'Triangle of Sadness'는 미간 주름을 뜻하는 미용 용어에서 왔습니다. 찌푸린 표정을 만드는 미간의 삼각형 부위를 가리키는 말로, 영화 1부에서 모델인 칼이 캐스팅 디렉터로부터 "슬픔의 삼각형을 없애라"는 지시를 받는 장면에서 직접 등장합니다. 겉모습을 관리해야 하는 모델 산업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정조차 상품화되는 현실을 동시에 짚어낸 제목입니다.

 

결론

《슬픔의 삼각형》은 제가 본 블랙 코미디 중에서 가장 오래 여운이 남은 영화 중 하나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위계가 얼마나 우연적이고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이렇게 유쾌하면서도 서늘하게 보여준 영화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다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강렬한 풍자와 즉각적인 카타르시스를 주는 동시에 뚜렷한 한계도 함께 안겨줍니다. 염세주의에 기댄 채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 결말은, 보는 사람에 따라 깊은 성찰이 될 수도 있고 그저 무력한 냉소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애비게일이 엘리베이터 앞에 주저앉던 그 순간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한 번도 완전히 자기 것이 아니었던 권력을 붙들려 했던 사람의 이야기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 궁금하다면, 먼저 직접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2부 요트 장면에서 자리를 뜨고 싶어지더라도 조금만 버텨보시길 권합니다. 제가 보기엔 그 불편함이 이 영화의 핵심이었으니까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_BxqZmX6V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