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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9점대를 유지하는 한국 성장영화를 찾다가 1986년작 <아홉살인>을 다시 꺼내 봤습니다. 처음엔 그냥 추억 소환용으로 틀었는데,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아홉 살짜리 아이의 눈높이로 바라본 세상이 이렇게까지 묵직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습니다.

 

줄거리 팩트: 여민과 우림, 그 여름의 기록

영화는 초등학교 5학년 백여민이라는 소년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골목대장을 때려눕히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는데, 사실 이 영화의 핵심은 폭력이 아니라 그 이후의 관계들입니다.

서울에서 전학 온 장우림은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캐릭터입니다. 미국에서 살다 왔다며 은근히 자랑하고,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는 도도한 아이입니다. 처음엔 저도 우림이 그냥 밉살스러운 캐릭터라고만 봤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영리한 건, 그 도도함 뒤에 숨겨진 사연을 아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꺼내 놓는다는 점입니다.

여민에게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맹인(시각장애)인 어머니를 위해 여름 내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며 돈을 모읍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건, 단순한 효심이 아니라 아홉 살 아이가 짊어진 어른의 무게였습니다. 어머니가 선글라스 가게에서 상처받는 걸 목격하고 복수까지 감행하는 장면은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두 아이의 관계는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며 쌓여갑니다. 여민의 고백 편지를 우림이 담임에게 보여버리는 장면, 우림의 거짓말이 탄로 나는 장면 모두 제가 보기에 아이들의 잔인함과 순수함이 동시에 담겨 있는 구간이었습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활용되는 내러티브 구조—즉, 인물의 서사가 충돌하며 감정이 누적되는 방식—는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쉽게 말해 '어떤 순서로 무엇을 보여주느냐'의 설계를 의미합니다.

우림의 아버지가 사실은 수 년 전 미국 출장 중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고백 장면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직접 그 장면에서 눈물이 날 뻔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얘기를 매일 하면 정말 돌아오실 것 같았다는 우림의 말은, 아이의 애도 방식이 어른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해 냈습니다.

결말에서 우림은 서울로 떠나기 전, 여민에게 선글라스를 선물로 줍니다. 여민이 간절히 사고 싶어 했던 바로 그것을 우림이 준비해 온 것입니다. 이 장면이 영화 전체를 한 번에 정리하는 카타르시스(catharsis) 역할을 합니다. 카타르시스란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정화의 순간을 뜻하는 개념으로, 고전 시학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 여민: 맹인 어머니를 위해 아이스케키 장사, 선글라스를 사주려는 소년
  • 우림: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해 미국 거짓말을 이어온 전학생
  • 두 아이의 갈등과 화해가 쌓이며 마지막 선글라스 선물로 마무리
  • 아이들의 골목 사회 안에서 질투, 배신, 용서가 모두 작동함
요약: 여민과 우림의 관계는 단순한 첫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발견하며 성장하는 과정이고, 그 결말은 선글라스 한 개로 모든 걸 정리해낸다.

 

성장영화로서의 한계: 제가 불편했던 부분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저는 꽤 복잡한 감정이 남았습니다. 감동적이었던 건 사실인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몇 가지 장면에서 분명히 걸리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가장 크게 불편했던 건 인물의 리얼리티 문제입니다. 아홉 살 아이치고 여민의 대사나 사유 방식이 지나치게 어른스럽습니다. "세상엔 말로 할 게 있고 글로 쓸 게 있다"는 식의 문장을 초등학생이 자연스럽게 내뱉는 건 제 경험상 좀 다릅니다. 아이의 입을 통해 어른의 철학을 대변하려는 시도, 즉 과잉 상징화(over-symbolism)가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과잉 상징화란 인물이나 사건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 오히려 자연스러운 감정 흐름을 방해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출처: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한국 성장영화 관련 분류 기준을 보면, 성장영화의 핵심은 '아이의 시선으로 세계를 재발견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 정의에는 충실하지만, 아이의 시선이 아니라 어른이 상상한 이상적인 아이의 시선에 더 가깝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또 하나는 빈곤과 장애의 처리 방식입니다. 어머니의 맹인 설정, 동네의 열악한 생활환경은 영화 배경으로 충분히 활용되지만, 그 이상의 사회적 질감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요소들은 여민의 성장통을 위한 소품으로 소비되고 마는 경향이 있습니다. 빈곤을 낭만화(romanticize)하는 방식, 즉 결핍을 아름다운 추억의 배경으로 세탁하는 서사 전략은 복고풍 성장영화의 전형적인 약점입니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KMDb)에 등재된 이 작품의 정보를 보면 원작 소설의 서사가 상당히 탄탄하게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갈등 해소 과정을 신파적 연출에 상당 부분 의존합니다. 신파(melodramatic convention)란 감정적 반응을 극대화하기 위해 우연이나 급작스러운 사건 전환을 반복 사용하는 연출 방식을 가리킵니다. 우림과 여민의 화해 장면이나 토끼 사건 전후의 흐름이 그 예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나쁘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제 경험상 이 정도 수준의 아역 연기와 서정적 영상미를 동시에 잡은 한국 영화는 많지 않습니다. 다만 "인생 영화"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전에, 이 영화가 전달하는 감동이 진짜 현실의 무게를 담은 것인지, 아니면 잘 다듬어진 향수의 포장지인지는 한 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요약: 영화는 아름다운 성장 서사를 갖추고 있지만, 과잉 상징화와 빈곤 낭만화라는 성장영화 장르의 고질적 한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아홉살인생 결말이 어떻게 되나요?

A. 서울로 떠나는 우림이 여민에게 선글라스를 선물로 건네며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우림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거짓말을 친구들 앞에서 고백하고, 여민은 그 우림을 묵묵히 기다려줍니다.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화해하는 장면보다 선글라스라는 소품으로 모든 감정을 정리하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Q. 아홉살인생을 아이들이 봐도 되는 영화인가요?

A. 폭력 장면이 일부 등장하지만 선정적이거나 잔인한 수준은 아닙니다. 다만 빈곤, 장애, 부모의 죽음 같은 무거운 소재가 포함돼 있어, 초등 고학년 이상이라면 오히려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누기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어른이 먼저 보고 아이와 대화 소재를 준비해 두는 방식을 권해 드립니다.

 

Q. 우림이 왜 미국 거짓말을 했나요?

A. 우림의 아버지는 수 년 전 미국 출장 중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림은 아버지 얘기를 계속하면 실제로 돌아오실 것 같다는 심리적 방어로 거짓말을 이어온 것입니다. 제가 그 고백 장면에서 가장 마음이 먹먹했던 이유도 이 부분이었습니다. 이는 아이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애도(grief)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Q. 영화 속 여민 어머니가 왜 맹인이 된 건가요?

A.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상세한 경위가 나오지는 않지만, 일하다 다쳐서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여민이 선글라스를 사려는 것도 어머니가 눈의 불편함을 숨기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상처를 막아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보호의 의미가 담긴 소품입니다.

 

결론

정리하면, 이 영화는 분명히 한 번쯤 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제가 직접 보고 나서 느낀 건, 감동 자체가 가짜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그 감동이 현실의 무게에서 오는 건지, 잘 설계된 신파 구조에서 오는 건지는 보는 사람이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성장영화가 불편한 진실 대신 아름다운 기억을 선택할 때, 관객은 쉽게 눈물을 흘리지만 극장 밖을 나서면 그 무게가 남지 않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그 경계를 몇 번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우림의 마지막 고백 장면과 선글라스 씬은, 어떤 기준으로 봐도 오래 기억될 만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한국 성장영화를 찾고 계신다면,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혹은 본 뒤에 이창동 감독의 초기작들과 비교해서 보는 방식을 권해 드립니다. 같은 시대, 같은 소재를 얼마나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지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ZsBLPAGsVtQ